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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과 문화] 모든 것이 넘치는 세상에서
    끄적이는 생각들/좋은 글귀 2014. 11. 7. 19:40

    나의 스승은 이른 저녁 불을 켜지 않았다. 다 어둡고 난 다음이 되어서야, 이야기가 끝이 났을 때 불을 켜곤 하였다. 아주 가끔은 “아이쿠, 내 정신 좀 봐”라고 하시며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켜셨지만 그것은 손님인 나를 의식해서이고 영동이고, 양평이고 스승의 댁을 찾았을 때 당신이 혼자 계시는 저녁 무렵, 거의 불을 켜지 않으시는 걸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아주 어두워지는 시간까지 바깥을 향하여 앉은 채로 이야기를 하다가 특별한 인기척이 있어야 불을 켰던 때가 많았다. 고 최하림 시인의 이야기다. 

    불을 켜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불을 켜지 않은 채 가만히 사위가 어스레해지는 바깥에 눈길을 주고 있으면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다. 알지 못할 것이기도 하려니와 알 것만 같은 그 무언가이기도 한 것이 한 순간 몰려온다. 그것으로 인해 그 시간이 채워지기도 하며 비워지기도 하는 그 무언가는 어떤 구체적인 덩어리가 아니어서 설명할 길은 없다. 그럼에도 탁 하고 불을 켜면 이내 사라지고 마는 그것의 정체는 느리고 아주 묽은 것임에는 분명하다. 굳이 덧붙이자면 세상의 가치와 속도와는 전혀 다른 화학물질을 닮았다는 정도 밖에는 설명할 능력도 없다. 

    좋은 음식의 향기로 가득 찬 식당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내 차례가 오면, 마지막으로 한껏 음식의 좋은 냄새들을 맡은 다음 그 길로 식당을 빠져나오고 싶다. 안 먹어도 먹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 

    내가 가는 길이 제 길이 아니었음 싶다. 길이 아닌 길은 두렵고 아득했지만 그 길은 길 이상의 의미를 알려주어서 좋기도 했었으니까.

    행복하고 싶지도 않다. 행복보다 더 큰 무엇을 위해서라면, 진정 더 큰 무엇이 있기는 한 것만 같으니 그것으로 대신할 수만 있다면. 

    비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 눈물이라는 감정만 사용했으면 싶다. 상처라는 말에 파묻히기 보다는 무시라는 감정으로 버텨냈으면 싶다. 

    개인적으로, 안 좋은 저 일과 안 좋은 이 일이 겹쳤으면 한다. 그 국면을 뛰어 넘기 위해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에너지를 쏟게 될 테니, 그런 다음 엄청난 기운으로 되살아날 테니. 

    마취를 해도 마취가 안 되는 기억의 부위가 하나쯤 있었으면 한다. 그것으로 가끔은 화들짝 놀라고 다치고 앓다가도 결국은 그런 일 하나쯤 오래 가져가도 좋으리라며 안 좋은 기억 하나쯤 붙들고 사는 일은 아무 무늬 없는 삶보다는 나을 테니. 

    나는 지금 여행 중인지라, 안경을 가져오지 않아 어렵지만 두고 온 것에 연연해 하지 않기로 한다. 먼 것을 볼 수 없는 것으로 다행이며 가까운 것을 볼 수 있으니 다행인 것으로 치면 그만이다. 

    적당히 조금 비어 있는 상태로는 안 된다. 지금의 안정으로부터 더 멀어져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얼마 전 만난 선배 시인이 꽤 오랜 기간 동안 시를 쓰고 있는데 시가 잘 되질 않아 입술이 부르텄다고 했다. 시가 잘 되지 않는 시기의 시인의 딱한 입장을 모르는 바가 아니어서 한마디 거들었다. “그럼 환경을 좀 바꿔보시죠? 마당에다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먹고 자고 하는 거예요.” 웃기는 말을 했지만 단지 웃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텐트 안에서의 시간은 어쩌면 그가 시인이라는 오랜만의 사실을 알게 해줄지도 모른다. 시인은 정면을 따라 걷는 자이기 보다는 이면의 모서리를 따라 위태로이 걷는 자일지도 모르니. 

    나 역시 나에게 스스로 시인인 척하기 위해 삶에서 끊어야 할 목록들을 늘리고만 싶다. 조금 많이 비운 상태로 되돌아가기 위해 우리가 무리하게 지불해야 할 것은 없다. 전화기를 끄는 일이나, 다소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드는 일. 그렇게 구멍을 만들어 그 안에 숨는 일. 적어도 내가 이 가을 스스로에게 더 시인인 척하려면 꽉 차서 충만한 상태가 아니라 조금은 비어 있는 상태에 놓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모든 것이 넘치는 세상에 문득 방문을 하시는 허무와 허전에게, 이 가을날 문득문득 우리의 심장을 두드리는 이 공허에게 대접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이병률 시인ㆍ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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