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이는 생각들/좋은 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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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모든 것이 넘치는 세상에서끄적이는 생각들/좋은 글귀 2014. 11. 7. 19:40
나의 스승은 이른 저녁 불을 켜지 않았다. 다 어둡고 난 다음이 되어서야, 이야기가 끝이 났을 때 불을 켜곤 하였다. 아주 가끔은 “아이쿠, 내 정신 좀 봐”라고 하시며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켜셨지만 그것은 손님인 나를 의식해서이고 영동이고, 양평이고 스승의 댁을 찾았을 때 당신이 혼자 계시는 저녁 무렵, 거의 불을 켜지 않으시는 걸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아주 어두워지는 시간까지 바깥을 향하여 앉은 채로 이야기를 하다가 특별한 인기척이 있어야 불을 켰던 때가 많았다. 고 최하림 시인의 이야기다. 불을 켜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불을 켜지 않은 채 가만히 사위가 어스레해지는 바깥에 눈길을 주고 있으면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다. 알지 못할 것이기도 하려니와 알 것만 같은 그 무언가이기도 한 것이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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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욕망에 대한 그리움끄적이는 생각들/좋은 글귀 2014. 11. 1. 21:37
[한겨레]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 기형도, 살림, 1990 “가을의 저녁은 너무 빈곤하다…가을은 약탈자”(87쪽)라던 기형도의 단상이 해질 녘 집을 나서는 나를 위로한다. 기형도(1960~1989). 그는 스물두 살에 백혈병에 걸렸고 그로부터 7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29년의 삶. 이 책은 그가 사망한 지 일 년 만에 고인이 쓴 여행기, 일기, 편지, 단상, 소설, 서평, 기사를 묶은 책이다. 김현이 제목을 정한 유고 시집 과 전집은 지금도 꾸준히 읽히고 있지만 이 책은 24년 전 ‘고전’이다. 내게 ‘희망’의 이미지는 상술, 무임승차, 불신이 느껴지는 위로, 네온사인 십자가 등이다. 문자 자체로도 희망(希望)은 좋은 의미가 아니다. 기형도는 간단히 썼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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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스틱 중끄적이는 생각들/좋은 글귀 2014. 10. 13. 22:21
똑바로..너의 신비한 검은 눈동자가 날 주시하면무너져 버릴 것만 같이 지새우는긴 밤을 상상했다혹시라도 정말 무너져 버린다면더 이상 아무도 고칠 수 없겠지가슴 깊이 스며오는네가 그리웠다가슴 깊이 스며오는네가 그리웠다..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이 입은 무의미해너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이 귀 또한 필요없을거야니가 비치지 않는다면 이 눈 또한..이 우주에서 단지 하나뿐인 상대와의기적같은 만남을 하고 싶어몇 만년 흘러도 변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과..봐... 이 세계는 파랑과 흰색, 녹색밖에 없어하지만 그 단순함이 마치 아이들이 그린 그림처럼질리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워 만약 등에 날개가 달려있다해도우리들은 아마 날 수 없을 것이다.오랫동안 시도해 봤었기에,모두들 겁쟁이가 되버린 것이다만약 나에게 날개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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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희정의 <하루키 스타일>중에서끄적이는 생각들/좋은 글귀 2014. 9. 22. 22:57
한 번이라도 마라톤을 뛰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오랜 시간을 달리면서 녹초가 될 만큼 힘들다가도 막상 결승점을 통과하고 나면 몸 안에 아직도 다 쓰지 못한 에너지가 남아 있는 것만 같은 개운치 않은 기분을. 하루키는 신경에 거슬리는 그 자잘한 괴로움을 ‘마음의 앙금’이라고 말한다. 바로 조금 전까지도 고통스러운 극한의 상황에서 ‘내가 왜 이런 걸 자처해서 하고 있지? 이제 이런 지독한 짓은 하지 않을 거야.’라고 뼈저리게 느꼈으면서도 결승점을 통과한 후 한숨 돌린 다음에는 다시 의욕이 불타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 이젠 다음 레이스에선 더 분발해야지.’ 뛰면서 힘들었던 생각보다는 ‘더 잘할 수 있었는데......’하는 아쉬움이 더 크기 때문이다. 조만간 다시 대면해서 매듭을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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